Q: 정규시즌 MVP는?

 

A: 야니스. 경쟁 상대조차도 없다. 르브론 제임스가 생애 첫 어시스트왕 타이틀과 함께 서부의 왕으로 떠올랐지만 팀승률과 볼륨스탯, 효율을 뒷받침 해주는 2차 스탯 등 모든 면에서 밀리고 있다.

 

제임스 하든과 돈치치는 시즌 초반 꽤나 뜨거운 모습을 보여주었지만 제법 식은 모습이다. 피로누적 탓일까? 비교적 훌륭한 1차 스탯이 효율과 함께 동반하락하고 있는 모양새다. 그렇다고 팀 성적을 내세울 수도 없는 상황.

 

카와이? 일단은 더 뛰고 나서 얘기하자.

 

야니스 안테토쿰보 성적

29.6점 / 13.8리바운드 / 5.8어시스트 / FG 55.1% / 3PT 31.1% / PER 31.8

   

 

 

Q: 신인왕은?

 

A: 아마도 모란트일 것이다. 자이온의 압도적인 활약이 갈등요소가 될 수 있지만 결국은 모란트의 손을 들어줄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이유는 단 하나, 자이온의 출장 경기수다. 

 

플레이오프 마지막 티켓을 향해 힘겹게 싸우는 두 소속팀의 비슷한 상황, 그리고 전통적으로 개인의 활약상에 좀 더 비중을 두어온 신인왕 타이틀의 특성상 자이온에게 무게감이 실리는 것이 사실. 하지만 자이온은 잔여 경기에 모두 출장한다 하더라도 총 37경기 출장에 불과하다. 정규시즌의 과반수도 채우지 못하는 상황이며 역사상 가장 적은 경기를 소화했던 1986년의 패트릭 유잉도 50경기를 채운 바 있다. 

 

NBA 규정에 출장 경기수가 정해지진 않았지만 만약 공동 신인왕이나 자이언의 단독 수상이 된다면 적지 않은 파장이 예상된다.

 

자 모란트 성적

17.6점 / 3.4리바운드 / 7.0어시스트 / FG 49.3% / 3PT 35.2%

 

자이온 윌리엄슨 성적

24.1점 / 6.8리바운드 / 2.1어시스트 / FG 59.3%

 

 

Q: MIP(기량발전상)은?

 

A: 뱀 아데바요. 올 시즌에는 유독 거론되는 후보들이 참 많다. 하지만 리스트에서 '가장 극적인 발전'이란 측면에서 아데바요만큼 어울리는 인물은 보이지 않는다.

 

지난 시즌 풀타임으로 82경기를 모두 소화했지만 이 중 선발 출장을 보장받은 것은 단 28경기. 이번 시즌들 아데바요는 전 경기 선발로 출장하며 대부분의 카테고리에서 상승곡선을 그렸다(슛성공률 소폭 하락) 

 

주목할 점은 바로 어시스트다. 5.1개의 어시스트는 팀의 간판스타 지미 버틀러에 이은 무려 2위에 해당하는 기록. 

 

뱀 아데바요 (성적변화)

2018-19시즌 / 8.9점 / 7.3리바운드 / 2.2어시스트 

2019-20시즌 / 16.2점 / 10.5리바운드 / 5.1어시스트

 

 

 

 

Q: 식스맨상은?

 

A: 몬트레즐 헤럴. 식스맨상의 전례를 살펴보면 뛰어난 개인성적과 함께 적당한 팀 성적이 담보되어 왔다. 역대 수상자의 소속팀 중 플레이오프 탈락은 단 한 번도 없었다. 헤럴은 이러한 조건을 모두 충족시키고도 남는 강력 후보다.

 

헤럴의 강력한 경쟁상대로 거론되는 이는 소속팀 LA 클리퍼스의 동료인 루 윌리엄스와 오클라호마시티 썬더의 떠오르는 독일특급 가드 데니스 슈뢰더다.

 

루 윌리엄스는 통산 3회 식스맨상을 거머쥐며 자말 크로포드와 함께 NBA 역사상 최다 수상자이다. 지난 시즌까지 2년 연속 수상중인데 '계속, 또는 자꾸 주지 않으려는' 암묵적 관성이 발목을 잡지 않을까 예상된다. 또한 클러치 타임에서의 존재감을 발휘했던 '스윗 루'의 시간은 이제 카와이 레너드나 폴 조지 등 새 얼굴들이 메우고 있다는 점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이미 지난 시즌부터 싹을 보여온 헤럴은 올 시즌 굉장히 적극적으로 공격에 임하며 개인 성적의 발전과 함께 팀 성적에도 크게 기여하고 있다. 특히 화이팅 넘치는 플레이 특성상 활발한 에너지를 팀에 불어 넣고 있다는 점이 프러스 요인이 아닐까.

 

몬트레즐 헤럴 성적

18.7점 / 7.1리바운드 / 1.7어시스트 / 1.2블락 / FG 58.0%

 


올랜도 매직은 드와이트 하워드의 트레이드 현실가능성을 드높이며 발 빠른 행보를 보이고 있다. 야후스포츠에서 해당 소스를 알아보았다.

드와이트 하워드는 브룩클린으로 트레이드되길 원하지만, 뉴저지 네츠가 이 딜을 원할 것인가?

하워드와 그의 에이전트 댄 페건은 한 주간에 하워드가 이적을 원하는 것에 대하여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리고 그 대상이 뉴저지 네츠임에는 변함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워드가 브룩클린으로 이적하기엔 시간이 많지 않다. 네츠의 제너럴 매니저인 빌리 킹이 조 존슨, 루이스 스콜라와 O.J 메이요 등 거물급 FA선수들의 영입을 위한 공격적인 전략을 펼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한편 데론 윌리엄스는 다음 주 수일 내에 네츠 잔류와 댈러스 매버릭스 이적간의 고민에 답을 내놓을 것으로 보인다. 익명의 소스의 의하면 윌리엄스는 드와이트 하워드의 영입이 성사될 경우, 네츠가 제안한 5100만 달러의 계약을 받아들일 것이라고 전했다.

네츠는 올해 FA 최대어인 데론 윌리엄스를 포함하여 브룩 로페즈, 제럴드 월러스 등 내부 계약이라는 문제가 산재해있다. 하워드와의 트레이드를 단행할 경우 샐러리캡과 사치세를 고려하여 로페즈와 젊은 유망주, 혹은 미래의 드래프트픽을 겸하여 딜을 진행하여야 할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수년간 기존 영건들로 리빌딩을 진행해온 네츠 입장에서 퍼다주기식의 출혈은 불가할 것이다.

한편 휴스턴 로케츠 역시 하워드 영입에 뛰어들었으며, 상당 수 젊은 유망주 선수들을 패키지로 한 총알장전에 나선 것으로 알려졌다.

21세기 최고의 센터로 군림해온 드와이트 하워드의 행보에 귀추가 주목된다.


좌측부터... 마이클 쿠퍼, 놈 닉슨, 커림 압둘자바, 밋치 컵첵, 폴 웨스테드, 자말 윌크스, 매직 존슨

런-앤-건 농구.

공격권만 넘어오면, 달리고 뛰고 점프해서 빠른 속도로 공격을 하고, 기회만 된다면 호쾌한 덩크까지 꽂아버리는 매력적인 농구 스타일입니다.

그러나... 역사를 돌아봐도 이 스타일로 우승까지 한 NBA 팀은 잘 찾아보기가 힘이 듭니다.

60년대에 첫 농구 왕조를 세웠던 보스턴 셀틱스

빌 러셀과 밥 쿠지를 중심으로 한 이 팀은 런-앤-건 팀은 아니었지만, 런-앤-건 농구를 곧잘 구사했던 팀이었습니다.

러셀이 이끈 셀틱스 골밑과 수비진은 몹시 두터웠고, 그래서 이 팀에는 속공기회도 많이 주어졌습니다. 전성기 때 경기당 8~9개의 블락샷을 했다고 전해지는 러셀은 블락샷을 할 때도 무작정 쳐내는 것이 아니라 자기 팀의 가드들 손에 공이 떨어질 수 있도록 쳐낼 곳을 정확하게 조준해서 블라킹을 하던 선수입니다. 이런 공은 영락없이 빠른 속공으로 이어졌고, 셀틱스는 아주 쉬운 득점들을 올릴 수 있었습니다.

물론, 이러기 위해선 러셀 뿐 아니라 시대를 앞서갔던 포인트 가드, 밥 쿠지의 역할 또한 매우 컸습니다.

그러나 60년대의 셀틱스는 속공기회를 잘 살려 팀의 전력에 보탬이 되는 농구를 한 팀이지 정통 런-앤-건 농구팀은 아니었습니다. 1972년에 69승을 거두며 우승을 했던 체임벌린과 웨스트의 레이커스도 런-앤-건 농구를 자주 하던 팀입니다. 그러나 이 팀도 정통 런-앤-건 팀은 아니었습니다.

 
60년대 중반에 창립된 NBA의 라이벌, ABA 리그

ABA 리그는 대놓고 NBA와는 모든 면에서 구별되는 농구를 하겠다고 천명하며 시작된 리그였습니다.

리그 전체가 뛰고 덩크하는 농구를 구사한 흥미만점의 리그였으나, NBA 리그의 강한 텃세와 훼방공작 등으로 미국 프로 스포츠 계에 깊은 뿌리를 내릴 수가 없었습니다. 방송 중계권도 NBA가 완전히 독점을 하는 바람에 ABA 경기는 지방 방송국을 통해서만 시청이 가능했습니다.

줄리어스 어빙이 이끈 뉴저지 넷츠를 포함해 이 때 우승한 ABA 팀들은 모두 런-앤-건 농구를 구사했던 팀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글의 취지가 ABA 리그가 아닌 정통 느림보(?) 농구만을 고집했던 NBA 리그 역사에서 런-앤-건 농구로 우승까지 한 팀이 어떻게 우승까지 가능했느냐는 것이기 때문에, ABA 리그 이야기는 다음에 기회가 되면 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럼 다시 NBA로 돌아오겠습니다.

보스턴 셀틱스 왕조가 천수를 다 누린 이후인 70년대는 골밑을 지배하는 자가 우승한다는 기본 취지 아래 센터들 중심의 농구가 펼쳐지며 수많은 명예의 전당급 센터들이 군웅할거하던 춘추전국 시대였습니다.

이러던 시기에 리그 역사에 큰 획을 그을 선수가 하나 등장했으니... 그의 이름이 바로 매직 존슨입니다.

 

 

고등학교와 대학 시절부터 포지션을 가리지 않고 종횡무진 코트를 누비며 소속학교들을 우승으로 이끈 이 농구천재는 타고난 센스와 농구 아이큐, 뛰어난 승부근성과 강심장은 물론, 수비하기가 무척 힘들었던 엇박자의 드리블 기술, 206cm라는 신장에 떡 벌어진 어깨와 근력, 농구하기에 딱 좋은 긴 팔과 긴 다리, 그리고 큰 손까지 보유한 괴물이었습니다.

이런 엄청난 선수가 당시 리그 MVP였던 커림 압둘자바의 레이커스에 합류를 한 것입니다.

레이커스엔 이미 리딩과 득점력, 스피드가 모두 리그 정상급이었던 놈 닉슨이란 가드가 있었지만, 레이커스는 매직 존슨을 중심으로 팀 칼라를 아예 바꿔야만 하는 상황에 놓이게 됩니다.

닉슨을 좋아했던 폴 웨스테드 감독은 매직을 중심으로 팀 칼라를 완전히 바꾸는 것에 대해 약간 미온적인 자세를 취했습니다. 그러나 신인답지 않게 엄청난 활약을 보이며 레이커스를 우승시켜버린 매직 존슨 앞에서 큰 소리만 치고 있을 수만은 없는 입장이었죠.

이러한 묘한 팀 내 갈등은 1981-82 시즌이 시작되면서 표면화되기 시작했고, 닉슨과 매직은 시즌 중에 서로를 대놓고 비판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다가 폴 웨스테드 감독이 사퇴를 했고, 어시스턴트였던 팻 라일리 감독이 지휘봉을 잡으면서 레이커스의 농구 스타일엔 일대 대변혁이 일어나게 됩니다.

팻 라일리 감독은 놈 닉슨과 매직 존슨이 경기 중에 서로의 포지션을 바꿔가며 뛰게 하는 "스위치 리딩 가드 시스템"을 도입합니다. 그리고 기회만 나면 속공으로 속전속결해버리는 "뛰는 농구"를 선수들에게 주문했습니다. 그러기 위해선, "팀 수비"와 "디펜스 리바운드"가 그 무엇보다 중요했기에, 압둘자바를 도와 골밑에서 궂은 일만 전문으로 해줄 수 있는 커트 램비스를 영입해 옵니다.

비록 불협화음과 함께 시작한 시즌이었으나, 이 런-앤-건 농구로 매직의 레이커스는 또 다시 리그 정상의 자리에 오르는 기염을 토합니다.

이런 80년대 초중반 레이커스의 쇼우타임 런-앤-건 농구의 위력이 잘 보여졌던 경기가 1984년 파이널 3차전입니다. 

참패를 한 후, 래리 버드가 "셀틱스 선수들이 모두 계집애들처럼 뛰었다" 며 굴욕으로 받아 들였던 경기이기도 하지요.

먼저 제가 편집한 짧은 동영상을 감상해 보십시오. 

어떠셨습니까?  정말 엄청난 공격력 아닙니까?

수비가 좋기로, 특히 상대팀의 속공을 잘 저지하기로 유명했던 당시의 보스턴 셀틱스가 속수무책으로 당해버린 레이커스의 런-앤-건 농구였습니다.

당시의 레이커스엔 작고 빠른 가드들이 없었습니다. 놈 닉슨은 이미 클리퍼스로 트레이드가 된 이후였습니다. 루키였던 바이런 스캇도 193cm에 윙스팬과 운동능력이 뛰어났던 선수였고, 매직 존슨은 206cm, 그리고 두 가드 포지션을 모두 소화할 수 있었던 만능 식스맨이자 에이스 스타퍼였던 마이클 쿠퍼가 198cm였습니다. 그런데도 이 팀은 틈만 보이면 속공으로 화력을 쏟아 부었습니다.

이 경기 하일라이트만 잘 관찰해서 보더라도 어떻게 해야 런-앤건 농구로 리그 정상에 올라설 수 있는 지를 쉽게 알 수가 있습니다.

첫째, 강력한 팀 수비는 필수입니다.

나이를 먹었으나 엄청난 내구력과 체력을 자랑하던 압둘자바가 페인트 존 수비를 장악했고, 팻 라일리 감독이 82년 시즌부터 자주 사용하기 시작했던 "함정 수비" (공을 가진 상대 수비수에게 기습적으로 두 세 선수가 붙으면서 패스할 루트를 차단하거나 상대선수의 턴오버를 유발시키는 수비)로 상대팀의 볼 무브먼트가 원활하게 돌지 못하도록 사전에 차단을 했습니다.

둘째, 제공권 장악입니다.

노장이었던 압둘자바, 그리고 체력이 왕성했던 블루칼라 워커, 커트 램비스, 파워 포워드의 힘과 사이즈를 지니고 있었던 제임스 워디, 센터를 봐도 괜찮았을 매직 존슨의 수비 리바운드 가세 등으로 당시의 레이커스는 어느 팀에게도 수비 리바운드에서 밀리는 법이 없었습니다 (단, 모제스 말론이 이끌던 식서스는 예외였습니다). 이런 수비 리바운드가 재빠른 아울렛 패스로 이어지면서 수많은 속공 기회가 자연스럽게 발생했던 것이죠.

셋째, 선수들의 사이즈와 상관없이 팀 전체적으로 뛰어난 기동력과 페이스업 기술이 중요합니다.

레이커스 선수들이 워낙에 커서 얼핏 보면 속공이 그리 빨라 보이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사이즈가 크면서도 잘 달릴 수 있었던 레이커스 선수들이었기에 리바운드에서도 밀리지 않으며 런-앤-건 농구를 구사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매직 존슨은 차치하고라도, 압둘자바, 워디, 쿠퍼, 램비스, 밥 맥카두 등이 모두 포지션 대비 월등한 사이즈를 갖고 있던 선수들이었지만, 속공 시에도 항상 최전방에 나가 활약을 하는 것이 보이실 겁니다. 이들은 웬만한 수비는 일대일 페이스업으로 따돌릴 수 있는 기술이 있었고, 또 코트를 계속 왕복으로 달릴 수 있는 체력도 갖추고 있었습니다.

넷째, 하프코트 오펜스에도 능해야 합니다.

어떻게 보면 너무나도 간단한 요건입니다. 경기 내내 달리기만 할 수는 없습니다. 플레이오프같이 수비가 더 강해지는 시기엔 누구나 지공의 중요성을 절감하게 되지요. 80년대 레이커스는 압둘자바와 제임스 워디, 자말 윌크스 등이 이끈 지공 또한 뛰어났던 팀입니다.

다섯째는...... 매직 존슨입니다.

이런 농구는 아무리 머리를 짜내고 연구해 봐도, 결국 매직 존슨 같은 특급 포인트 가드가 있어야만 그 효력을 발휘할 수 있다는 결론에 도달합니다.

매직 존슨은 본인이 리바운드를 잡고 코스트-투-코스트 공격으로 상대팀 수비진을 마음먹은대로 무너뜨릴 수 있었던 선수입니다. 르브론 제임스와 같은 하드웨어로 유연하고도 빠른 속도로 드리블을 치고 들어오는 이 거인을 상대팀 수비수들은 보고만 있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사이즈가 되는 선수들이 막기엔 너무 빨랐고, 스피드가 되는 선수들이 막기엔 신장과 힘이 너무도 월등했습니다. 

이런 선수가 코트 정중앙을 가로질러 달려나가면, 나머지 레이커스 선수들은 마치 이순신 장군의 '학익진' 대형처럼 코트 양 사이드로 넓게 퍼져서 V자 형태로 그 뒤를 따르는 형국이 됩니다. 이렇게 되면 상대팀 수비진은 파울로 속공을 끊는 수 밖엔 별다른 방법이 없어집니다. 일단 매직 존슨의 파워넘치는 중앙 돌파를 막기도 버거울 뿐더러, 그나마 매직 존슨의 길목을 막는다 치면, 매직이 기동력 좋은 양 사이드의 다른 레이커스 선수들에게 완벽한 어시스트를 넣어주니까요.

혹, 이들의 속공을 노련한 수비로 막는다 하더라도, 매직 존슨 같은 패싱력이 좋은 선수들이 상대팀의 수비대형이 완전히 갖춰지기 전에 "얼리 오펜스"로 득점할 수 있도록 빼어난 어시스트 패스를 찔러 넣어주기 때문에... 일차적으로 막는다는 것도 실상은 별 효용이 없습니다.

결국, 매직 존슨 한 선수로부터 파생되는 엄청난 시너지 효과가 80년대 레이커스의 런-앤-건 농구가 성공할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였던 셈입니다.

이상, 위의 글에서 살펴본 바, 역사를 자세히 돌아봐도 런-앤-건 농구로 현 NBA에서 우승을 하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지를 알 수가 있습니다. 런-앤-건 농구로 우승까지 하며 십년 가까이 그 위세를 떨쳤던 레이커스에는 매직 존슨이라는 거성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매직 존슨 하나 때문에 가능한 공격대형은 아니었습니다. 탄탄한 수비와 팀워크, 강력한 제공권 장악, 훌륭한 감독의 전술, 그리고 모든 팀원들이 갖추고 있었던 기동력과 페이스업 기술 등이 아름답게 조화를 이뤘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입니다.

잘 달리는 농구를 한 팀들은 그 당시에도 있었고 (어빙의 식서스, 거빈의 스퍼스, 잉글리쉬의 너겟츠), 또 현재에도 있습니다. 그러나 셋째 요건을 제외한 나머지 사항들을 골고루 갖추고 있지 못했기 때문에 우승까지는 힘들었던 것이죠.

매직 존슨같은 선수는 앞으로도 나오기 힘들 겁니다. 그러나 속공을 잘 이끌 수 있는 특급 포인트 가드를 보유한 팀이 위의 나머지 네 가지 사항도 잘 준수한다면, 런-앤-건 농구로 우승할 수 있는 팀이 NBA에 또 출현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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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21일 LA 레이커스전을 앞두고, 주전 포인트가드 모 윌리암스가 어깨 부상으로 최소 4주 결장 판정을 받았을 때만 해도 클리블랜드 캐벌리어스의 연승을 예상한 전문가는 거의 없었다. 지난 시즌 올스타에 선정되는 등 클리블랜드의 정규시즌 1위에 큰 공헌을 했고 이번 시즌 역시 변함없는 활약으로 클리블랜드의 가드진을 이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설상가상으로 윌리암스 대신 선발 포인트가드로 출전한 딜론테 웨스트마저 손가락 부상으로 결장하자 클리블랜드의 미래에 대한 어두운 전망들이 쏟아져나왔다.

하지만 클리블랜드는 웰리암스와 웨스트가 팀을 이탈한 이후 치른 8경기를 모두 이기며 리그 단독 1위로 치고 올라갔다. 시즌 초반 5할 승률을 넘나들며 우려를 자아냈지만 52경기를 치른 시점에서 41승 11패를 기록, 66승 16패를 거뒀던 지난 시즌과 똑같은 페이스를 달리고 있는 것이다.

클리블랜드가 어려운 상황에도 불구하고 괴력을 발휘하고 있는 것은 지난 시즌 주전 가드진이 모두 빠진 공백을 나머지 선수들이 잘 메우고 있기 때문이다. 클리블랜드의 연승 비결을 살펴보자.


부상 선수들의 역할

부상자 속출에 대한 클리블랜드의 대응책을 살펴보기 위해서는 먼저 기존 부상 선수들이 맡고 있던 역할이 무엇인지 알아볼 필요가 있다.

윌리암스는 에이스 르브론 제임스에 이은 명실상부한 제2 공격옵션이었다. 돌파가 주무기인 르브론과 조화를 이뤄 정교한 외곽슛(3점성공율 42.9%)으로 상대 수비진의 빈틈을 노렸다. 또한 지난 여름 영입한 샤킬 오닐을 비롯한 골밑 플레이어들에게 르브론 대신 패스를 넣어주는 역할도 수행했다. 윌리암스가 패싱플레이를 잘 수행해주면서 클리블랜드의 빅맨진뿐아니라 르브론의 컷인 빈도도 크게 늘었고, 그동안 르브론에게 집중되었던 볼소유 문제도 상당 부분 해결됐다.

뿐만아니라 르브론이 쉬는 2쿼터와 4쿼터 초반에는 스스로 슛찬스를 노리는 에이스 역할을 맡아 좋은 모습을 보여줬다. '포인트가드의 몸을 한 슈팅가드'라는 평가를 받아왔던 윌리암스에게는 최적의 역할이었다.

웨스트는 지난 시즌에는 선발 슈팅가드로 뛰었지만 이번 시즌에는 앤써니 파커에게 그 자리를 넘겨주고 백업 포인트가드로 나오고 있다. 웨스트의 신장(191cm)은 슈팅가드 포지션에서는 약점이었지만 포인트가드 포지션에서는 오히려 강점으로 변했다. 운동능력과 기술, 터프함을 겸비한 왼손잡이 웨스트는 일반적으로 단신이거나 운동능력이 떨어지는 상대 백업 포인트가드를 상대로 포스트업을 통해 손쉬운 득점을 올릴 수 있었다. 작년 12월 밀워키의 루크 리드노어를 상대로 24분간 21득점을 몰아넣은 것이 좋은 예다.

근성있는 수비수인 웨스트는 상대가 공격형 가드를 중심으로 공격을 펼칠 때 이를 수비하는 역할도 맡고 있었다. 포인트가드와 슈팅가드를 모두 수비할 수 있는 웨스트는 상대 공격을 백코트에서부터 압박하며 리듬을 무너뜨렸다.

이렇게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고 있던 두 선수가 모두 부상으로 물러나자, 마이크 브라운 감독은 주어진 자원을 가장 적절하게 재배치해 이들의 공백을 메우려 했다.


깁슨의 재기용



대니얼 깁슨에게 이번 시즌은 알다가도 모를 시간이었을것이다. 발가락 부상에 시달린 지난 시즌에는 중용됐지만 최고의 몸상태를 보인 이번 시즌에는 오히려 벤치를 지키는 일이 늘었기 때문이다. 파커와 자마리오 문 등이 영입되면서 포지션 경쟁이 심해졌고 슈팅가드를 보기에는 신장(188cm)이, 포인트가드를 보기에는 볼 핸들링 능력이 부족했던 깁슨이 슈팅 능력만으로 출장시간을 확보하기는 무리였다. 여름 내내 고향에서 수비력 향상에 주력했지만 이를 보여줄 기회를 얻지 못했다. 

결국 깁슨은 윌리암스와 웨스트가 부상당하기 전 8경기에서 평균 7분도 안되는 출장시간을 받아야 했다. 리그 3점성공율 1위(47.3%)를 기록하고 있는 깁슨에게는 납득하기 힘든 시간이었다.

하지만 윌리암스와 웨스트가 빠지자 깁슨에게 기회가 돌아왔다. 지난달 23일(이하 현지시각) 오클라호마 시티와의 홈경기부터 선발 출장한 깁슨은 7경기 평균 36분간 코트를 누비며 12.4점을 올리고 있다. 3점성공율도 46%로 크게 떨어지지 않았다. 적어도 외곽슛에서는 윌리암스의 공백이 느껴지지 않는 이유다.

깁슨은 전통적인 리딩가드 스타일의 가드는 아니다. 패스나 드리블보다는 볼 없이 움직인 후 점프슛을 노린다. 따라서 윌리암스가 수행했던 포인트가드 역할은 기대하기 힘들다. 하지만 깁슨은 리그에서 르브론의 돌파력을 가장 잘 이용할 수 있는 가드이기도 하다. 르브론의 패스를 받을 수 있는 위치로 향하는 능력은 깁슨의 신인 시즌이었던 2006-2007 시즌 플레이오프에서 디트로이트를 상대로 3점슛 7개를 몰아넣으며 일찌기 검증된 바 있다. 이때문에 르브론의 두터운 신뢰를 얻어온 깁슨은 이번 시즌에도 변함없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선발로 나온 첫 경기였던 오클라호마 시티 전에서 경기 종료 직전 르브론의 패스를 받아 결승 3점슛을 넣은 장면은 시즌 최고 명장면중 하나였다.

슈터가 규칙적인 출장시간을 얻지 못하면 슛감을 유지하기 힘들다는 걸 감안할 때, 깁슨의 자기관리는 놀라운 수준이다. 브라운 감독과 르브론이 그에게 무한한 신뢰를 보내는 이유다.


돌아온 흑상어 오닐



시즌 초반 오닐이 부진한 모습을 보였을 때 많은 우려의 목소리가 있었다. 72년생으로 다음달 6일 38세가 되는 오닐의 선수생명이 이제 끝난 것 아니냐는 것이었다. 2천만 달러에 달하는 연봉을 감수해가며 오닐을 영입한 대니 페리 단장은 집중 성토의 대상이 됐고, 이번 시즌 만기 계약인 오닐이 올스타 휴식기 이전에 트레이드되리라는 전망도 나왔다.

하지만 오닐은 역시 오닐이었다. 윌리암스와 웨스트가 빠지고 더 많은 역할을 부여받자 오닐은 왕년의 강력한 모습을 보여주기 시작했다. 8경기에서 평균 28분동안 출장해서 득점 16.7점, 야투율은 무려 65%에 달하고 있다. 골밑에서 자리잡는 과정이 한층 간결해졌고, 일단 볼을 받으면 '골밑에서 오닐을 1:1로 막는 것은 불가능'이라는 것이 변함없이 증명되고 있다. 신장 198cm에 불과한 척 헤이즈(휴스턴 로케츠)를 상대로 무기력한 모습을 보이던 시즌 초와는 딴판인 모습이다. 최근 르브론이 '오닐은 우리 모두를 속였다. 괜히 모두가 걱정하게 만들었으니 사과해야 할 것'이라고 말한 것이 단순한 농담은 아닌 것이다.

오닐 효과는 개인 성적뿐아니라 팀 성적으로도 증명되고 있다. NBA.com 칼럼니스트 존 슈만에 의하면 클리블랜드는 페인트존 평균득점 순위에서 12위를 기록하고 있다. 지난 시즌 28위에 비해 크게 오른 수치다. 오닐이 제 모습을 찾으면서 오닐에게 더블팀이 붙기 시작했고, 반대 사이드에서 뛰어드는 앤더슨 바레장과 J.J. 힉슨에게는 노마크 찬스가 연달아 주어지고 있다. 게다가 상대 수비진은 이제 골밑 돌파를 시도하는 르브론을 상대로 더이상 빅맨이 헬프디펜스를 하기 힘들어졌다. 바로 옆에서 기다리고 있는 오닐에게 패스가 갈 경우 자동을 2점을 헌납하게 되기 때문이다.

헬프디펜스의 부담에서 벗어난 르브론은 이번 시즌 골밑슛 성공율 70.5%를 기록, 지난 시즌(68.5%)보다 높은 성공율을 보이고 있다. 오닐 영입 당시 제기된 '두 명 모두 골밑 중심 플레이를 펼치기 때문에 활동 반경이 겹치게 될 것'이라는 우려는 사실이 아니었음이 증명된 셈이다.

오닐 효과는 수비면에서도 뚜렷히 나타나고 있다. 클리블랜드는 팀 수비 성적 중요 부문인 최소실점, 최저 야투허용율, 최저 페인트존 실점 부문에서 모두 선두를 달리고 있다. 오닐이 커다란 몸을 이용해 상대 골밑 공격을 철저히 막음에 따라 상대팀이 골밑 공략을 통한 확률농구를 구사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느린 발때문에 2:2 수비에서 문제를 보일 것이라는 우려도 있었지만 실보다는 득이 더 많았다.

오닐의 골밑 존재감은 빅 센터가 있는 강팀을 상대로 뚜렷하게 드러나고 있다. 지난 시즌 클리블랜드는 레이커스와의 정규시즌 두 경기를 통해 페인트존 득점에서 104-52로 큰 열세를 보였다. 파우 가솔과 앤드루 바이넘이 버티는 골밑을 공략할 선수가 사실상 르브론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골밑에서 멀리 떨어져 슛을 던져야 했던 결과는 두 경기 모두 완패였다. 하지만 이번 시즌 오닐이 가세한 이후 치른 두 경기에서, 클리블랜드는 레이커스 골밑을 상대로 88-74 우세를 보였다. 오닐이 바이넘을 파울트러블로 몰아넣으며 골밑을 굳게 지킨 덕분이었다. 그리고 결과는 2전 전승이었다.

올랜도전 역시 마찬가지다. 지난 시즌 컨퍼런스 파이널 6경기에서 하워드는 평균 20.6득점 13.8리바운드를 기록했다. 올랜도가 승리한 네 경기에서 하워드의 평균득점은 30점을 웃돌았다. 클리블랜드의 골밑 자원으로는 하워드를 전혀 막지 못했고, 이를 돕기 위해 수비 진형을 좁히면 어김없이 올랜도의 3점슛이 폭발했다. 하지만 오닐이 가세한 이번 시즌 1차전에서 하워드는 파울트러블에 시달리며 11득점에 그쳤다. 하워드에게 통산 평균 13.6점만을 허용한 오닐의 존재감이 증명된 것이다.

오닐이 가져다 준 또 하나의 이점은 지난 시즌까지 선발 센터로 뛰었던 지드루너스 일가우스카스가 벤치에서 나올 수 있게 됐다는 것이다. 221cm의 장신에 고감도 외곽 슈팅 능력(이번 시즌 3점성공율 55%)을 겸비한 일가우스카스는 지난 시즌에 평균 12.9득점을 기록한 준수한 선수다. 르브론의 신인 시절부터 함께 해온 유일한 선수로 팀 시스템을 누구보다도 잘 이해하고 있다. 시즌 초반 익숙치 않은 벤치 출장으로 한동안 슬럼프를 겪었지만 금방 컨디션을 끌어올렸다. 일가우스카스는 오닐과 번갈아 출전하며 변함없이 좋은 모습을 보이고 있다.

일가우스카스의 중장거리 슈팅 능력을 이용해 오닐과 함께 코트에 서는 '트윈 타워'가 가동될 때는 상대 빅맨진을 공포에 빠뜨리기도 한다. 오닐과 일가우스카스는 이번 시즌 평균 18.4득점, 12.2리바운드를 합작하며 최강의 센터진을 구축하고 있다.

각 팀의 수비가 강력해지고 골밑이 강한 팀이 우위를 갖는 플레이오프가 다가올수록 오닐의 가치는 점점 더 높아질 것이다.


'Mr. Everything' 르브론



하지만 위의 모든 시도가 의미를 가지는 것은 르브론의 존재 때문이다. 윌리암스와 웨스트가 빠진 후 르브론은 차원이 다른 농구를 펼치고 있다.

르브론은 지단달 21일 레이커스전부터 9경기를 치르는 동안 6경기에서는 30점 이상을, 5경기에서는 두 자릿수 어시스트를 기록했다. 이 기간동안 르브론이 기록한 평균성적은 30.8득점 6.9리바운드 10.1어시스트에 달한다. 포지션을 알아맞히기 힘든 전천후 활약이다.

하지만 실제 경기에서 나타나는 르브론의 다재다능함은 각종 수치를 능가한다. 르브론은 경기 초반에는 포워드로 출장, 리딩 능력이 떨어지는 깁슨을 대신해 포인트포워드 역할을 하며 오닐과 깁슨, 힉슨 등에게 찬스를 만들어준다. 르브론의 한 경기 어시스트 중 반 정도가 이 시간대에 나온다. 1쿼터 중반에 접어들어 빅맨 파트너가 일가우스카스와 바레장으로 바뀌면 6~7년간 호흡을 맞춰온 이들과 2:2 플레이를 통해 득점을 올리기 시작한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르브론의 모습이다.

1쿼터 후반이 되면 더욱더 놀라운 모습을 보인다. 이 시간대에 백업 포인트가드로 나오던 웨스트를 대신해 아예 포인트가드를 맡는 것이다. 윙 플레이어로 문과 자와드 윌리암스가 나오면 코트 위의 다섯 명이 모두 203cm를 넘는 초 장신 라인업이 완성된다. 신장 203cm에 몸무게 113kg이라는 파워포워드에나 어울리는 체구에도 불구하고 상대 포인트가드와의 스피드 경쟁에 밀리지 않기에 가능한 일이다. 반대로 상대팀은 190cm 내외의 포인트가드가 르브론을 막아야 하므로 큰 고민에 빠지게 된다. 신장차를 이용해 상대 백업 포인트가드를 압박하던 웨스트의 역할을 더 크고 더 빠르며 더 높은 르브론이 맡는 것이다.

2쿼터 초반에 윌리암스의 역할을 대신해 공격을 이끌던 르브론은 2쿼터 말미에는 파워포워드로 변신한다. 3점 라인 주변에 슈터 3명을 세워놓고 바레장과 2:2 공격을 하는 이 공격시스템을 클리블랜드 코칭스태프들은 '네일(손톱) 공격'이라 부른다. 르브론과 바레장이라는 두 손톱으로 상대 수비진형을 찢어낸 후 르브론이 직접 득점을 시도하거나 패스를 통해 두 번째 찬스를 노린다. 최그 최고의 패서 중 하나인 르브론이 언제든지 외곽의 슈터들에게 패스를 해줄 수 있으므로 상대 수비진의 간격이 멀어질 수밖에 없고, 르브론이 돌파를 할 때 서로 도와 막아낼 수 없게 되는 것이다.

르브론은 이렇게 24분 동안 포인트포워드-주득점원-순수 포인트가드-주득점원-파워포워드 등의 다양한 역할을 맡으며 이 모두에서 완벽한 결과를 이끌어내고 있다. 리그 역사를 통틀어봐도 이런 일을 할 수 있었던 선수는 극히 드물다. 주전 포인트가드진 두 명이 모두 결장해도 볼 흐름이 오히려 좋아지는 이유고 이번 시즌 동부컨퍼런스 이달의 선수를 모두 휩쓸고 있는 이유다.


죽의 미학

클리블랜드는 핵심 선수 두 명을 잃었지만 남은 선수들이 역할을 조금씩 늘리며 무패 가도를 달려왔다. 웨스트는 6일 팀 훈련을 시작했고 올스타 휴식기간 후에는 그동안 재활에 힘쓰고 있던 리온 포우가 윌리암스와 함께 복귀한다. 위기를 넘긴 것이다.

벽돌을 차곡차곡 채운 상자에서 벽돌 한 장을 빼면 벽돌이 빠진 자리가 그대로 드러난다. 새 벽돌을 채워넣지 않는 이상 그 구멍은 막히지 않는다. 하지만 그릇에 죽을 가득 채운 후 한 숟가락을 떠내도 죽을 떠낸 자리는 금방 사라진다. 주위의 죽이 빈 공간을 메우면서 흔적을 지우는 것이다.

'죽의 미학'으로 위기를 기회로 바꾼 클리블랜드가 창단 40주년을 맞아 첫 우승의 감격을 맛볼 수 있을지에 팬들의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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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6
년 세계 농구 선수권은 냉전시대의 산물인 올림픽 보이코트로 인해 연이어 무산됐던 구소련과 미국의 농구 맞대결을 볼 수 있었던 장이어서 당시에 매우 큰 관심을 끌었던 대회였습니다.

 

미국에서도 그 당시에 막 떠오르던 스포츠 전문 케이블 방송인 TNT가 테드 터너 사장의 전폭적인 지지 아래 대회 주요 경기들을 미국에 생중계 해줄 정도로 관심도가 매우 컸습니다.

이것이 당시로서는 매우 이례적인 현상이었는데, 왜냐하면 그 당시만 해도 세계 농구 선수권은 유럽 국가들이나 열을 올린 대회였지, 올림픽에만 신경을 쓰던 농구 본고장인 미국에선 정작 별 관심을 두지 않던 대회였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큰 관심 때문이었을까요? 미국은 남녀 농구 모두 결승전에서 숙적인 구소련을 꺾으며 금메달을 목에 걸 수 있었습니다. 특히, 여자농구에선 '여자 마이클 조던'이란 별명을 달고 다녔던 셰릴 밀러 (前 인디애나 페이서스 가드 레지 밀러의 누나)의 대활약상을 빼놓을 수가 없는데, 여자농구 얘기까지 하면 너무 길어질 것 같아서 일단 여기서 정리하겠습니다.

 

데이빗 로빈슨의 미국과 아비다스 사보니스의 구소련이 결승에서 맞붙으며 막을 내린 대회이긴 했으나, 사실 많은 농구 전문가들은 대회가 시작되기 전부터 유고슬라비아를 최강의 전력으로 뽑았었습니다. 당시의 유고팀엔 80년 모스크바 올림픽 금메달의 주역들은 물론유럽 최고 수퍼스타였던 드라전 페트로비치, 청소년 대표팀에서 발탁된 약관 18세의 블라데 디바치 등이 신구의 조화를 이루며 막강한 라인업으로 포진해 있었습니다. 어떻게 보면, 구소련이나 미국팀보다도 더 화려한 팀구성이었습니다.

 

그래서였을까요? 준결승에서 격돌한 구소련 대 유고슬라비아 간의 혈투는 당시로선 단일 농구경기로서 최고의 시청률을 올렸고, 경기 수준 또한 매우 높았습니다. 또한, 이 경기는 국제농구 경기 사상 최고의 역전 드라마를 연출해내기도 했지요. 모든 역전 드라마가 그렇듯이, 이 경기에서도 비운의 주인공은 따로 있었습니다.

 

오늘, 이 경기의 백미였던 대역전의 순간을 잠시 회고해볼까 합니다.

 

이 경기는 당시의 유럽을 양분하고 있던 22세 동갑내기 수퍼스타, 페트로비치와 사보니스의 대결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습니다.

 

양 국가를 대표하는 대들보들 답게, '전천후 폭격기' 페트로비치는 집중적인 수비를 받으면서도 29득점을 해 유고슬라비아 공격의 선봉장 역할을 톡톡히 해냈고, 故 레드 아워백 옹에 의해 '7피트 4인치의 빌 월튼'이라 불리우던 사보니스는 3점 슛 4개를 포함, 25득점, 10리바운드, 5어시스트, 6블락으로 구소련을 이끌었습니다.

 


영상에서 보시는 바와 같이, 사보니스는 유고의 수비가 지역방어를 펼치면 외곽으로 나와 3점슛(4개 시도해 모두 성공)을 던졌고, 유고가 수비진영을 넓히면 안으로 들어와 훅 슛과 파워무브로 공격하는 다양성과 영리함을 보여줬습니다. 또한, 6개의 블락을 성공함과 동시에 수많은 유고 선수들의 슛 궤도를 바꾸는 에너지 넘치는 수비력까지 선보였습니다.

 

사보니스의 이러한 공수에 걸친 맹활약에 힘입어 유고의 내노라 하는 센터들은 모두 5반칙 퇴장을 당했습니다. 그래서 후반전의 중반부터는 '루키' 디바치가 사보니스를 막아야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고의 전력은 탄탄했습니다.

 

후반전이 거의 끝나갈 무렵, 그러니까 40여 초를 남겨둔 상황에서 유고슬라비아의 백전노장 큐추라가 삼점 슛을 성공시켰을 때 유고는 9점 차까지 점수를 벌여놓을 수 있었습니다.

 

85 76.  남은 시간은 45승부는 거의 끝난 것처럼 보였습니다.

 

기적이 일어난 것은 바로 이 때였습니다.

 

다음 포제션에서 구소련의 국보급 센터 사보니스가 백보드를 맞추며 장거리 삼점 슛을 성공시킨 것입니다.

 

85 79.

 

유고슬라비아가 당황하기 시작했습니다. 드라전 페트로비치의 형, 알렉산더가 공을 드리블하며 나갔습니다. 이 때, 사보니스와 같은 리투아니아 출신인 코미츄스가 공을 스틸하며 재빨리 티코넨코에게 패스를 해주었고, 티코넨코는 조금의 지체함도 없이 곧바로 삼점을 던졌습니다. 이것도 깨끗하게 들어갑니다.

 

85 82. 점수차는 3점으로 좁혀졌습니다.

 

위태위태한 순간이었으나, 공격권은 아직도 유고슬라비아의 손에 있었습니다.

 

구소련은 계속해서 파울로 유고의 리듬을 끊으며 실책을 유도했습니다.

 

이제 남은 시간은 15초.... 공만 빼앗기지 않는다면 유고의 승리는 이대로 굳어질 전망이었습니다.

 

타이트한 압박수비를 펼치는 구소련의 수비 앞에 유고 선수들이 조금씩 당황을 하는 가운데, 아무도 막고 있지 않던 어린 센터, 블라데 디바치에게 공이 건네졌습니다.

 


블라데 디바치
... 18세의 청소년 대표 출신... 몸이 유연하고 볼핸들링과 패싱력이 좋아서, 유고슬라비아 농구협회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유고의 레전드 센터 출신 감독인 코시치 씨가 대표팀에 합류시킨 인물입니다.

 

국가대표 경험이 없어서였을까요? 아니면, 자신의 볼핸들링에 너무 자신감을 가졌기 때문일까요? 디바치는 이 숨막히는 판국에 이리저리 드리블을 쳤습니다. 이를 놓칠 구소련 수비가 아니죠. 소련 가드진 둘이 디바치에게 바싹 붙자마자, 디바치는 너무나도 어이없는 실수를 저지르고 맙니다. 잡았던 공을 다시 드리블하려 한 것입니다.

 

이 수준높은 경기에서, 이 숨막히는 클러치 상황에서, 디바치는 더블 드리블 바이얼레이션을 범하고 말았습니다.

 
구소련에게 기사회생의 기회가 왔습니다.

 

별명이 '시베리아 백여우'인 포인트가드 볼터스가 공을 몰고 들어갑니다. 그를 쫓아가던 드라전 페트로비치를 거대한 사보니스가 픽을 걸어주며 스크린을 섰고, 볼터스는 사보니스를 방패삼아 회심의 삼점을 던집니다.

 

동점이었습니다.

 

불과 40초 동안에... 상대팀의 두 개의 턴오버를 묶어 세 개의 삼점 슛으로 연결시키며 승부를 원점으로 돌린 구소련 팀이었습니다.

 

그렇게 전개가 된 세계 농구 선수권 사상 최대의 역전 드라마는 이제 승부를 연장전으로 끌고 갑니다.

 

이 마지막 40여 초의 숨막히는 순간을 동영상으로 감상해보시기 바랍니다. 사보니스의 3점포부터 시작합니다.

 

연장전이 시작되긴 했으나, 이미 전의를 상실한 유고슬라비아는 기가 있는대로 살아난 구소련의 적수가 될 수 없었습니다. 미국과의 결승전 티켓은 결국 구소련이 거머 쥐었습니다.

 

이 위대한 역전 드라마의 비운의 주인공, 블라데 디바치가 이 경기를 회고하며 인터뷰를 가진 적이 있는데... 인터뷰에서 디바치는 자신의 결정적인 실책 이후엔 정말로 아무 것도 눈에 보이지가 않았다고 말했습니다. 특히, 후반전이 동점으로 종료되는 순간, 한 선배선수가 자신에게 다가와 "너 같은 XX는 죽어버려!" 하는 외침을 들은 후엔 그 자리에서 자살하고 싶은 충동까지 느꼈다고 합니다.

 

연장전 내내 울면서 뛰었다고 하죠. 2002년 월드컵 이탈리아 전에서 페널티킥을 실축한 후 경기 내내 울면서 뛰었다고 한 안정환 선수가 오버랩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안정환 선수와는 달리, 디바치에겐 설욕의 기회조차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40초 간에 걸쳐 벌어진 농구 선수권 사상 최고의 각본없는 역전 드라마는 그렇게 막을 내렸습니다.

 

비 온 뒤의 땅이 굳는다고 했던가요?  이 일을 계기로 디바치는 더 한층 성숙한 선수로 발전할 수 있었고, 결국 꿈에도 그리던 NBA 리그에 입성할 수 있게도 되지요. 88년 올림픽에선 또 다시 사보니스의 벽을 넘지 못하며 은메달에 머물렀지만, 90년 세계 선수권에선 토니 쿠코치, 페트로비치와 함께 그렇게도 바라던 정상의 자리에 조국을 올려놓는 주역이 됩니다. 많은 농구인들은 입을 모아 1990년 당시의 이 유고슬라비아 팀을 드림팀이 출현하기 전까지의 역대 최고 FIBA 국가대표팀이었다고 평합니다.

 

그러나 1986년의 한 여름날, 운명의 여신이 그에게 내린 너무도 가혹한 결정은 평생을 두고 그의 가슴 속에 천추의 한으로 남아있을 것입니다. 

 


글의 내용이 너무 우울한 듯 해서 재미있는 영상으로 게시물을 끝맺겠습니다.

위에 언급한 숨막히는 40여 초 바로 직전에 나온 장면입니다.
심판의 판정에 항의하는 아비다스 사보니스의 모습이지요. 인상을 쓰며 주심에게 소리를 질러보지만, 주심이 노려보자 언제 그랬냐는 듯이 손사레를 치며 방향을 바꿔 자기 갈 길(?)을 가는 능청스럽고 유머스러운 모습입니다. 당시에 TNT 중계를 맡았던 릭 베리와 빌 러셀로 하여금 박장대소를 터뜨리게 한 장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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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뉴올리언스 아레나의 천장에는 두 장의 유니폼이 영구 결번 되어 걸려있다. 한 장은 뉴올리언스로 연고지를 이전하면서 이벤트 형식을 빌려 영구 결번 시킨 뉴올리언스 농구의 영웅 피트 마라비치의 7번 유니폼이다.

그리고 그 옆에는 또 한 장의 유니폼이 걸려있다. 사실 마라비치가 호네츠 소속으로 플레이했던 적이 없었음을 떠올려본다면, 그야말로 구단 역사상 최초의 영구 결번 유니폼인 셈이다.

그 유니폼의 주인공은 마라비치 같은 전설적인 농구 스타는 아니었다. 화려한 플레이를 펼치던 스타플레이어도 아니었다. 공격 보다는 수비를, 화려함 보다는 궂은일을 도맡아 하던 선수였다. 하지만 코트 위에서 누구보다 열심히 달렸고, 뜨거운 심장으로 게임에 임했으며, 카리스마 있는 캡틴이자 라커룸 리더였고, 홈팬들을 위해 지역 사회 봉사 활동에도 최선을 다하던 선수였다. 고교 시절부터 사귀어왔던 아내에게는 너무나 다정한 남편이었고, 한 가정의 듬직한 아버지였다.

시간이 흐르고 흘러 모든 선수가 그러하듯 그 유니폼의 주인공 역시 더 이상 코트 위에 설 수 없게 된 날이 찾아왔고, 팀은 주저 없이 그의 유니폼을 영구 결번 시키기로 결정했다. 2000년 2월 9일, 그의 영구 결번식이 진행됐다. 그러나 모두의 박수 속에 열렸어야 할 축하 행사는 숙연하고 엄숙하게 진행되었다. 경기장을 가득 메운 팬들과 그를 아끼던 동료 선수들은 눈시울을 붉혔고, 영구 결번의 주인공은 행사에 참석하지도 못했다. 그의 어린 아들이 아버지를 대신해 유니폼을 경기장 하늘 높이에 걸어두었다.

영구 결번 행사로부터 꼭 4주 전이었던 2000년 1월 12일. 영구 결번의 주인공이 눈을 감았기 때문이다.

그 때 그 선수, 오늘의 주인공은 호네츠의 영원한 캡틴 바비 필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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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바비 필스, NBA 리거가 되다

바비 필스는 1969년 12월 20일 루이지애나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 그의 아버지는 가족들을 부양하기 위해 해외 노동자 생활을 하셨고, 어머니 역시 생활고에 시달리느라 필스를 제대로 돌볼 수 없었다. 해서 어린 필스는 보육원에서 성장했다. 하지만 필스는 강한 몸과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타고난 운동 신경을 뽐내며 농구에 재능을 보이기 시작했고, 동시에 학업에도 소홀하지 않으며 훌륭한 청년으로 성장했다.

이후 서던 대학에 입학한 필스는 농구와 학업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으며 멋진 대학 생활을 보낸다. 특히 졸업반이었던 1990-91 시즌에는 123개의 3점슛을 성공시키며 평균 28.4득점, 4.7리바운드, 1.9어시스트를 기록하며 자신의 위력을 뽐냈다. 대학 졸업장을 손에 든 필스는 NBA의 문을 두드렸다. 하지만 약체 팀의 에이스였던 그를 주목하는 팀은 그리 많지 않았다. 1991년 드래프트에 참가한 필스는 2라운드 45번 픽으로 밀워키에 지명되며 가까스로 NBA 입성에 성공한다. 하지만 프로의 높은 벽을 실감하며 단 한 경기도 뛰어보지 못한 채 계약에 실패, 결국 프로로써의 첫 커리어는 CBA 선수로 시작하게 된다.


그러나 필스는 좌절 앞에 쉽게 포기하는 나약한 남자가 아니었다. 그는 NBA를 향한 꿈을 포기하지 않았다. 결국 1991-92 시즌 도중 클리블랜드와 10일 계약을 맺는데 성공했고, 이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당시 클리블랜드는 결코 만만한 팀이 아니었다. 브래드 도허티, 마크 프라이스, 래리 낸스 등이 활약하던 동부 컨퍼런스의 강자였다. 그런 팀에서 살아남기 위해 필스가 쏟았던 노력의 크기는 감히 가늠할 수 없을 정도의 크기였으리라.

필스는 도허티와 프라이스가 팀을 떠나고 테럴 브랜든을 중심으로 새롭게 전력을 재편될 무렵, 완벽히 리그에 적응을 끝마친 상태였다. 그는 이미 클리블랜드의 확고한 주전 가드로 입지를 공고히 하고 있었다.

어느 덧 당당한 NBA 리거가 된 필스는 1997년 여름 FA 자격을 얻게 됐다. 그리고 필스는 호네츠의 일원이 되었다. 당시 그는 높은 연봉 보다는 장기 계약을 원했다. 이는 선수로써의 이해관계도 포함된 결정이었지만, 가족들에게 보다 안정적인 생활을 안겨주고 싶다는 마음이 컸기 때문이었다. 필스가 합류하기 직전인 1996-97 시즌의 샬럿은 54승 28패로 당시 프랜차이즈 역사상 최고 승률을 기록하며 장밋빛 미래를 펼치고 있었다. 샬럿은 리그의 강팀으로써 확실히 자리매김 하기 위해 필스를 영입하며 전력 강화를 시도한 것이다.



2. 샬럿 호네츠의 캡틴

필스는 팀에 합류하자마자 주전 슈팅 가드로 출장했다. 퍼리미터 디펜스의 중심이자 에이스 스타퍼로 맹활약했고, 때로는 공격의 선봉에도 나서며 전천후 플레이를 펼쳤다. 비록 포지션 대비 신장은 작은 편이었지만 엄청난 활동량과 뛰어난 근력, 그리고 누구보다 커다란 투지를 무기로 게임에 임했다. 수비 센스가 좋아서 패싱 레인을 잘라 들어오는 스틸에도 능했고, 공격 파울을 유도하는 솜씨도 일품이었다. 대학 시절 장기였던 3점슛은 여전히 강력한 공격 옵션이었으며 트랜지션 게임에서는 화끈한 덩크슛을 꽂아넣기도 했다.

필스가 샬럿에 합류한 첫 번째 시즌이었던 1997-98 시즌. 팀은 51승 31패를 기록하며 프랜차이즈 사상 최초로 2년 연속 50+승을 달성하는데 성공하며 동부 컨퍼런스 4번 시드로 플레이오프에 진출했다. 1라운드에서 애틀랜타를 3승 1패로 가볍게 물리친 샬럿은 2라운드에서 시카고를 상대하게 되었다. 당시 시카고는 2년 연속 NBA 정상에 오른 디펜딩 챔피언이었다. 이 때 두 팀의 대결에서 마이클 조던과 필스의 매치업이 시리즈 키포인트로 주목받았을 만큼 필스는 팀에서 큰 비중을 가진 선수가 되어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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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리즈를 앞두고 필스는 조던을 어떻게 상대할 것인지에 대한 질문을 받게 되자 "Michael, Who?" 라고 대답하며 큰 화제를 낳았다. 조던에게 정면으로 도전장을 던진 것이다. 물론 최후의 승자는 조던이었다. 하지만 조던을 그렇게 도발한 이후 실제로 그를 훌륭히 막아내며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특히 시리즈 2차전에서는 조던을 단 22득점으로 봉쇄하기도 했다. 이 시리즈에서 조던은 경기당 평균 29.6득점을 기록했는데, 이는 조던이 1998년 플레이오프에서 유일하게 평균 30+득점을 넘어서지 못한 시리즈로 기록되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것이 필스의 마지막 플레이오프 무대가 되었다. 이듬해였던 1998-99 시즌, 샬럿은 라이스 등의 주축 선수들이 연이어 부상을 당하며 큰 어려움에 빠졌고 레이커스의 에디 존스, 엘덴 캠벨을 얻기 위해 라이스, JR 리드 등을 떠나보내는 대형 트레이드를 성사시키며 리빌딩에 들어갔다. 당시만 하더라도 리그 탑레벨의 슈팅 가드였던 존스의 등장으로 인해 필스는 팀의 주전 라인업에서 밀려나고 말았다. 하지만 그는 어떤 불만도 표현하지 않았으며 되레 존스의 절친을 자청하며 라커룸 분위기를 주도했다.

새 천년이 열리던 1999-2000 시즌. 필스는 데이빗 웨슬리와 함께 팀의 캡틴이 되었다. 비록 스타플레이어는 아니었지만 그 동안 팀을 위해 보여주었던 헌신적인 모습을 인정받은 것이다.

샬럿의 분위기는 어느 때 보다 좋았다. 존스와 앤써니 메이슨 등이 이끄는 주전 라인업은 어느 때보다 견고해보였고 브래드 밀러, 리키 데이비스, 배런 데이비스와 같은 유망주들도 전 포지션에 걸쳐 두루 자리하고 있었으며 필스가 이끄는 벤치 멤버들 역시 탄탄한 전력을 뽐냈다. 비록 지난 시즌 플레이오프 진출에 실패하긴 했지만 팀의 재정비가 끝이 난 시즌 막판에는 14승 4패를 기록하며 시즌을 마무리했기에 수많은 전문가들 역시 샬럿의 전력을 높이 평가하고 있었다.

샬럿은 한 때 8연승을 질주하며 16승 7패로 시즌을 시작했다. 쾌조의 스타트였다. 하지만 12월에 들어서면서 최악의 스케줄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으니, 12월 30일부터 1월 10일에 걸치는 기간(12일) 동안 6경기 연속 원정 경기를 갖게 된 것이다. 샬럿은 마치 뭔가에 홀린 듯 패배하기 시작했고 6경기를 모두 내주고 말았다. 6연패의 늪에 빠진 것이다. 6연속 원정 경기를 마친 뒤 다음 경기를 준비하는 필스의 마음은 착잡하기 그지없었다. 캡틴으로써의 막중한 책임감은 패배를 견디지 못하는 그를 더욱 힘들게 만들었다.


3. 이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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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 1월 12일. 힘겨운 원정길에서 샬럿으로 돌아온 필스는 간단한 슈팅 훈련을 마치고 돌아가던 중 팀의 공동 캡틴이자 절친한 동료인 웨슬리와 대화를 나눴다.

웨슬리는 연패로 인한 스트레스로 힘들어 하던 필스에게 자동차 경주로 기분 전환을 해보지 않겠냐고 말했다. 평소 같았다면 언제나 바른 생활 사나이로 살아오던 필스가 응했을 리 없었던 제의.

하지만 계속되는 패배와 캡틴으로써의 중압감은 잠시 그의 판단력을 흐리게 만들었다. 두 선수는 나란히 각자의 포르쉐를 몰고서 샬럿의 어느 산간 도로로 들어갔다. 그 도로는 평소에도 아마추어 레이서들의 레이스 코스로 종종 이용되던 곳이었는데 워낙 사고 위험이 높은 곳이었다.

맹렬한 속도로 달려 내려오던 필스의 포르쉐는 순간적으로 중심을 잃었고, 마주오던 차량과 3중 추돌 사고를 일으켰다. 필스는 현장에서 즉사했다.



갑작스러운 필스의 죽음은 샬럿과 리그 전체에 커다란 충격을 몰고 왔다. 샬럿의 모든 경기 일정은 무기한 연기 되었고 구단은 그의 백넘버 13번을 프랜차이즈 최초의 영구 결번으로 지정했다. 2000년 2월 9일. 필스의 친정팀이었던 클리블랜드와의 경기 하프 타임을 통해 필스의 영구 결번식이 진행되었다. 이미 세상에 없는 필스를 대신해 그의 남동생이 코트로 걸어 나왔고, 그 어깨에는 필스의 둘째 아들이 올라있었다. 필스의 13번 유니폼은 어린 아들의 손에 의해 샬럿 콜로세움의 하늘 높이 올라갔다. 필스를 아끼던 수많은 동료들과 팬들은 그와의 이별을 슬퍼하며 눈시울을 붉혔다.

필스가 곁을 떠난 후, 샬럿 선수들은 절치부심 힘을 내기 시작한다. 필스의 사망 이후 31승 16패를 기록하며 플레이오프 진출에 성공한 것이다. 하지만 또 한 명의 캡틴인 웨슬리는 시즌 내내 경찰 조사를 받으며 친구를 떠나보낸 죄책감에 힘들어 했고, 데릭 콜먼 등의 주축 선수들이 연이어 부상을 당하며 전력 누수가 심해졌다. 결국 플레이오프 1라운드에서 앨런 아이버슨이 이끄는 필라델피아에게 1승 3패를 당하며 힘없이 시즌을 마무리했다.


4. 필스를 기억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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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리그 제일의 에이스 스타퍼이자 샬럿의 절대적인 캡틴이었다. 또한 농구 이외에 골프, 미식축구, 사이클 등에도 능했던 만능 스포츠맨이었다. 하지만 필스가 정말로 많은 팬들의 사랑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은 코트 밖에서 보여줬던 그의 모습들 때문이었다.

1998년 NBA Sportsmanship Award 수상자이기도 했던 필스는 자신을 응원해주는 팬들의 사랑에 보답하기 위해 무던히 애쓰던 사람이었다. 활발한 사회봉사 활동은 물론이거니와 다양한 장학 재단을 설립하기도 했다. 또한 팀 메이트들과 주변 지인들에게도 봉사 활동을 적극적으로 권장하며 스스로 앞장서 모범을 보였다. 코트 밖에서는 언제나 밝고 유쾌한 남자였으며 팬들에게 가장 호의적인 선수이기도 했다. 자신에게 사인을 요청하는 어린 팬들은 절대 그냥 지나치지 않았으며 비시즌 기간에도 소탈한 모습으로 샬럿의 사람들과 어울려지냈다. 거기에 수려한 외모까지 갖추고 있었으니 팬들은 이런 그를 사랑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필스가 호네츠의 일원으로 플레이 한 것은 채 3년이 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많은 팬들은 아직도 그를 그리워하고 있다. 코트 안에서 상대팀과 맞설 때는 누구보다 무서운 얼굴로 코트를 달렸지만, 코트 밖에서 팬들을 만날 때에는 누구보다 멋진 미소를 지어보이던 그를 기억하고 있다. 너무나 믿음직스러웠던 그의 뒷모습을, 팀이 위기에 처할 때마다 동료들을 다독이며 용기를 북돋아 주던 그를 추억하고 있다.

지금 이 순간에도 경기장 가장 높은 곳에서 후배들을 지켜보며 파이팅을 외치고 있을 필스. 그는 영원한 호네츠의 캡틴으로 기억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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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영원한 저의 친구이며, 영원한 남편이고, 영원한 연인입니다."

- 필스의 장례식에서, 아내 켄들 필스

그 때 그 선수. 오늘의 주인공은 바비 필스였다.


Bobby Phill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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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산 467경기 출장 (379선발)
평균 11.0득점, 3.1리바운드, 2.7어시스트, 1.3스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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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EWS & COLUMNS/HELTANT79 2010. 1. 6. 22:38

NBA도 예외없는 '비정규직 설움'

BY 알 수 없는 사용자



세계 최고의 농구리그인 NBA에도 '비정규직'은 존재한다. 비보장 계약 선수들을 가리키는 말이다.


비보장 계약이란 연봉 전액 또는 일부분의 지급이 보장되어있지 않은 계약으로, 이 계약을 맺은 선수는 시즌 도중 방출돼도 잔여 연봉을 받을 수 없다. 선수에게 크게 불리한 계약이지만 NBA 선수로 뛰는 것은 큰 기회기 때문에 많은 선수들이 비보장 계약을 감수한다.

NBA의 비정규직이라 할 수 있는 이들 비보장 계약 선수들에겐 크리스마스와도 같은 시기가 찾아왔다. 비보장 계약 선수의 보장 계약 전환일이다. 리그 규정상 비보장 계약 선수는 매년 1월 10일(이하 현지시각) 이후 팀에 남아있을 경우 계약이 자동적으로 보장 계약으로 전환된다. 비정규직 근로자가 정규직으로 바뀌는 것과 같은 것이다. 올해는 1월 10일이 일요일이기 때문에 이번주 마지막 업무일인 8일이 보장 계약 전환일이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이 시기는 가장 많은 비보장 계약 선수들이 눈물을 흘리는 시기이기도 하다. 보장 계약 전환일 이후 연봉부담을 꺼리는 구단이 필요없는 비보장 계약 선수를 방출하는 것이다. 최근 경기침체 여파로 재정 문제를 겪고 있는 많은 구단이 비보장 계약 선수의 방출을 통해 연봉 부담을 해결하려 하면서 '정규직 전환 직전 계약 해지'를 겪는 선수들이 많아지고 있다.

방출 공시 기간이 48시간이므로, 6일부터 8일까지의 시간은 비보장 계약 선수에겐 가장 마음졸이는 시간이 아닐 수 없는 것이다.

방출 뉴스의 포문은 골든스테이트 워리어스가 열었다. 골든스테이트는 6일 베테랑 파워포워드 마이키 무어를 웨이브한다고 밝혔다. 지난 시즌 보스턴에서 뛰었던 무어는 작년 여름 계약 종료 후 골든스테이트와 비보장 계약을 맺었으나 새 팀을 알아봐야 할 처지가 됐다.

밀워키 벅스는 장신 포인트가드 로코 유키치를 방출했다. 지난 시즌까지 토론토에서 뛰다 트레이드로 밀워키에 합류했던 유키치는 '무서운 신인' 브랜든 제닝스에 가려 출장기회를 잡지 못하다가 스스로 방출을 요청했다. 유키치는 터키 리그에서 뛰게 될 예정이다.

토론토 랩터스에서는 포워드 팝스 멘사-봉수가 짐을 쌌다. 지난 시즌에만 세 번이나 팀을 옮겼던 멘사-봉수는 이번 시즌을 앞두고 토론토와 두 번째로 비보장 계약을 맺었지만 보장 계약을 이끌어내는 데 실패했다. 하지만 토론토는 멘사-봉수와 '10일 계약'을 체결해 한 번 더 기회를 줄 전망이다. '10일 계약' 선수는 글자그대로 열흘간만 계약하는 단기계약직을 말한다.

한편 애틀랜타는 2년차 포워드 오델로 헌터를 방출했다. 역시 비보장 계약 선수였다.

보장 계약 전환에 성공하며 한숨 돌린 선수도 있다. 시즌 초반 은퇴를 선언했다 친정팀 필라델피아 76 서스로 복귀하는 등 화제의 주인공이 됐던 앨런 아이버슨은 6일 구단으로부터 잔여 시즌 계약 보장 통보를 받았다. 드웨인 웨이드(마이애미 히트)에 이어 동부 컨퍼런스 올스타 투표 2위를 달리며 생애 11번째 올스타전 출전이 유력한 아이버슨에겐 경사가 겹친 셈이다.

클리블랜드 캐벌리어스의는 등록 선수 15명 중 4명이 비보장 계약 선수다. 시즌 중 전력강화 움직임이 예상되고 있는 클리블랜드인 만큼 이들 비보장 계약 선수들을 어떻게 활용할 것일지가 관심거리다. 유능한 선수를 지니고 있지만 재정 부담으로 비보장 계약 선수를 원하는 팀과 트레이드를 할 수도 있고 FA 영입을 위해 현재 꽉 차있는 자리를 비보장 선수의 방출로 비울 수도 있는 것이다. 덴버 너게츠 조지 칼 감독의 아들인 코비 칼이 '해고 대상 1순위'로 예상되는 가운데, 클리블랜드는 금요일 덴버 원정 경기를 치른다. 

NBA 선수 자격이 위태롭지만 비보장 계약 선수들은 의외로 담담한 모습이다. '비즈니스는 비즈니스일 뿐'이라는 말을 여러 번 실감해왔기 때문이다. 클리블랜드의 비보장 계약 선수인 자와드 윌리암스가 지역지 플레인 딜러와의 인터뷰에서 한 말이 이들의 태도를 잘 보여준다.

"지금까지 이런 일을 많이 겪어왔다. 만약 무슨 일이 일어나면, 금방 극복하고 (클리블랜드가 아닌)다른 곳에서 나의 가치를 증명하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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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EWS & COLUMNS/HELTANT79 2009. 12. 31. 23:43

클리블랜드 2009년 결산

BY 알 수 없는 사용자

창단 이래 가장 시끄러웠던 클리블랜드 캐벌리어스의 2009년이 마무리됐다. 클리블랜드는 30일(이하 현지시각) 벌어진 애틀랜타 호크스와의 홈경기에서 이날 생일을 맞은 르브론 제임스가 48득점을 폭발시키고 앤더슨 바레장이 막판 극적인 3점슛을 집어넣으며 대역전승을 일궈냈다. 곧이어 벌어진 보스턴 셀틱스-피닉스 선즈 경기에서 보스턴이 패함에 따라 클리블랜드는 동부 컨퍼런스 1위의 성적으로 2010년을 맞게 됐다.

클리블랜드의 2009년을 돌아본다.



1월_ 발목 부상을 당한 주전 센터 지드루너스 일가우스카스 없이 2009년을 맞이한 클리블랜드 앞에는 서부 원정 4경기를 포함한 험난한 일정이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클리블랜드는 1월을 거치며 진지하게 우승후보로 거론되기 시작했다.

9일 벌어진 보스턴과의 홈경기에서 르브론이 완벽하게 경기를 장악하며 완승을 거둔 클리블랜드는 곧이어 주전 파워포워드 벤 월러스가 독감으로 한동안 나오지 못했고, 가드 딜론테 웨스트가 손목 골절을 당하는 등 며 정상 전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LA레이커스와 올랜도 매직 원정에서의 완패는 장신팀에 약하다는 과제를 던져줬다.

하지만 모든 악재에도 불구하고 10승 4패를 올린 클리블랜드는 여전히 동부 컨퍼런스 선두권을 달리며 리그 관계자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시즌 개막 전 46승이 예상됐던 팀이 일약 우승후보로 올라선 한 달이었다.


2월_ 부상 문제는 계속해서 클리블랜드를 괴롭혔다. 웨스트 없이 치른 레이커스전에서 시즌 첫 홈경기 패배를 당한데 이어 다음날 인디애나 페이서스에게도 석패하며 시즌 첫 연패를 맛봤다. 트레이드 소문이 퍼지기 시작했고 실제로 여러 팀과 교섭했지만, 대니 페리 단장의 선택은 현상유지였다. 이때 논의된 트레이드 중 하나인 샤킬 오닐 영입은 시즌이 끝난 뒤 현실화된다.

한편 모리스 윌리암스가 르브론과 함께 생애 첫 올스타에 선발되면서 클리블랜드는 2005년 이후 4년 만에 르브론 이외의 올스타를 배출하게 됐다. 르브론은 4일 뉴욕 닉스전에서는 52득점 11어시스트 9리바운드, 20일 밀워키 벅스전에서는 3쿼터 2분여 동안 16점을 몰아넣으며 55득점 9어시스트를 올리는 등 역사에 남을 경기를 펼쳤다.


3월_ 웨스트가 복귀했지만 이번에는 월러스가 정강이 골절을 당하며 이탈했다. 페리 단장은 오클라호마 썬더에서 바이아웃된 조 스미스를 영입하며 구멍을 메우려 했지만 벤치 핵심 빅맨인 앤더슨 바레장이 선발로 올라간 빈자리를 완전히 메우기에는 역부족이었다.

하지만 클리블랜드는 발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보스턴 셀틱스 원정경기에서 졌지만 나머지 16경기를 모두 승리하며 팀 역사상 월별 최다승을 올렸다. 시즌 60승 돌파와 원정 경기 23승 돌파 역시 팀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이었다. 보스턴과 올랜도의 페이스가 떨어지면서 동부 컨퍼런스 1위 독주 체제를 굳혔다.

시즌 초반 팀 통산 리바운드 신기록을 세운 일가우스카스는 22일 뉴저지 네츠와의 홈경기에서 4개의 블록슛을 기록하며 팀 통산 블록슛 신기록도 수립했다.


4월_ 충격의 2연패로 4월을 시작했다. 특히 플레이오프 상대가 될 수도 있었던 올랜도와의 원정경기에서 당한 29점차 대패는 불행의 전주곡과도 같았다. 하지만 클리블랜드는 이후 치른 5경기에서 모두 승리를 거두며 정규시즌 한 경기를 남겨두고 리그 1위를 확정지었다. 창단 이후 처음 맞는 경사였다. 동부 컨퍼런스 1번 시드로 플레이오프에 임한 클리블랜드는 1라운드 상대인 디트로이트를 평균 15점 이상의 점수차로 4경기만에 일축해버렸다.

팀의 정규시즌 66승 16패를 이끈 마이크 브라운 감독은 '올해의 감독상'을 수상하며 1976년 빌 피치 이후 창단 이후 이 상을 받은 두 번째 클리블랜드 감독이 됐다.


5월_ 환호와 탄식이 어우러진 한 달이었다. 르브론은 6일 생애 첫 MVP를 수상했다. 리그 역사상 웨스 언셀드(전 워싱턴 불리츠), 모지스 말론(전 휴스턴 로케츠) 다음으로 어린 나이의 수상이었다. 르브론은 모교인 세인트 빈센트-세인트 메리 고등학교 체육관에서 열린 시상식에서 가족과 친지, 팀 동료들의 박수를 받으며 MVP 트로피를 들어올렸다.

애틀랜타와 가진 플레이오프 2라운드도 르브론을 위한 무대였다. 르브론은 애틀랜타 수비진을 완벽하게 농락하며 클리블랜드의 평균 18점차 4전 전승을 이끌었다. 클리블랜드의 경기력은 완벽해보였고 누구나 르브론과 코비 브라이언트의 결승을 꿈꾸고 있었다.

하지만 동부컨퍼런스 결승에서 만난 올랜도는 이런 꿈을 무참히 깨버렸다. 드와이트 하워드가 골밑을 장악한 올랜도는 라샤드 루이스 등 슈터진이 외곽포를 폭발시키며 클리블랜드를 압도했고, 모 윌리암스가 최악의 부진을 보인 클리블랜드는 르브론의 생애 최고 활약에도 불구하고 결승 진출에 실패하고 말았다.

탈락 확정 직후 르브론은 상대팀 선수와의 악수와 공식 기자회견을 거부하며 구설수에 올랐고 시즌 내내 이어졌던 클리블랜드에 대한 찬탄은 비관으로 바뀌었다. 긴 여름방학의 시작이었다.


6월_ 페리 단장이 마침내 칼을 빼들었다. 올랜도와의 플레이오프 시리즈를 치르면서 골밑 강화의 필요성을 절감한 페리 단장은 벤 월러스와 사샤 파블로비치, 2010년 드래프트 2라운드 지명권과 약간의 현금을 피닉스로 넘기고 샤킬 오닐을 영입하는 트레이드를 단행했다. 리그 관계자들을 충격에 빠뜨린 대형 트레이드였다.

다음날 벌어진 드래프트에서 페리 단장은 콩고 출신의 무명 선수 크리스천 아옝가를 1라운드에서 지명하며 다시 한 번 리그를 놀라게 했다. 애시당초 이번 드래프트에서 뽑은 신인은 다음 시즌 계획에 없을 정도로 오프시즌 선수 수집에 전념하겠다는 선언이었다.


7월_ 페리 단장 취임 이래 가장 바쁜 여름이 시작됐다. 찰리 빌라누에바, 론 아테스트, 트레버 아리자 등 대어급 FA 사냥에 연달아 실패한 페리 단장은 대신 앤써니 파커와 자마리오 문을 영입하며 장신 윙 플레이어를 확보했다. 바레장과 6년 재계약을 맺으며 팀과 미래를 함께 할 것임을 분명히 하기도 했다.

한편 오닐은 워싱턴에서 벌어진 WWE 프로레슬링에 일일 단장으로 출연해 쇼맨의 면모를 유감없이 과시했다.


8월_ 클리블랜드는 선수영입을 멈추지 않았다. 라이벌 보스턴의 주력 빅맨 리온 포우를 영입한 것이다. 무릎 수술 회복 여부가 불투명해 보스턴과의 재계약에 어려움을 겪고 있던 포우는 클리블랜드가 최소연봉만 제시했음에도 불구하고 기꺼이 클리블랜드행을 선택했다. 이듬해 2월에나 복귀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만큼 기다릴 가치는 충분하다는 것이 페리 단장의 생각이었다.

오닐은 NBA 선수 중 처음으로 자신만의 전국방송 버라이어티 프로그램의 주인공이 됐다. ABC 방송에서 'Shaq VS'란 이름으로 방영된 이 프로그램에서 오닐은 야구의 앨버트 푸홀스, 권투의 오스카 델라호야, 수영의 마이클 펠프스 등 각 종목을 대표하는 슈퍼스타들과 맞대결을 펼쳤다.


9월_ 르브론의 고등학교 시절을 다룬 다큐멘터리 영화 'More than a game'이 공개됐다. 7년여에 걸친 제작기간 끝에 만들어진 영화였다. 이 영화는 각종 독립영화제에서 호평받았다. 동시에 출간된 르브론의 자서전 'Shooting Star' 역시 화젯거리였다.

클리블랜드 선수들은 28일 열린 미디어 데이 행사에서 처음으로 모두 모여 새 시즌을 시작했다. 며칠 전 총기소지 혐의로 체포됐던 웨스트 역시 밝은 표정으로 인터뷰에 응했다.

하지만 밝은 분위기는 다음날 곧바로 뒤집혔다. 평생 조울증을 앓아온 웨스트가 사전 통보 없이 팀을 이탈한 것이다. 웨스트를 선발 슈팅가드감으로 여기고 있던 브라운 감독의 시즌 구상에 위기가 찾아왔다.


10월_ 웨스트는 이탈 몇 주 뒤 팀에 복귀했지만 여전히 경기에 나서지 못하고 있었다. 게다가 시범경기를 치르는 동안 A형 독감이 팀을 덮쳤다. 르브론을 비롯해 선수단의 거의 절반과 브라운 감독이 독감에 걸렸다. 이때문에 르브론이 신종플루에 걸렸다는 소문이 퍼지기도 했다. 클리블랜드는 거의 2주 동안 제대로 훈련을 하지 못했고, 시즌 준비에 큰 차질을 빚게 됐다. 브라운 감독이 '정규시즌 첫 2주는 시범경기와 같음'을 선언할 정도였다.

브라운 감독의 말은 허언이 아니었다. 27일 보스턴과의 개막전과 다음날 토론토 랩터스 원정에서 충격의 2연패를 당한 클리블랜드는 당초 우승전력으로 평가받았던 것과는 달리 무기력한 모습으로 일관했다. 선수들간에 호흡이 전혀 맞지 않았고 브라운 감독의 선수 기용 방식 역시 들쭉날쭉했다.

르브론은 개막전에서 역대 최연소 통산 13,000점을 기록했지만 팀 패배로 빛이 바랬다.

11월_ 지난 시즌 홈에서 2패만 당한 클리블랜드는 정규시즌 6경기만에 벌써 홈 2패째를 기록했다. 설상가상으로 오닐이 어깨 부상으로 6경기를 결장했다. 하지만 올랜도 원정경기에서 오닐은 하워드를 잘 막아내며 클리블랜드의 완승에 큰 공헌을 했다. 페리 단장이 오닐을 영입한 이유가 증명된 경기였다.

시즌 7번째 경기였던 뉴욕 닉스 원정부터 2년차 J.J. 힉슨이 선발로 기용되기 시작했다. 지난 시즌 주전 멤버였던 일가우스카스와 바레장을 벤치에서 출격시켜 경기 내내 고른 경기력을 유지하겠다는 브라운 감독의 복안은 이후 계속 지켜져 오고 있다.

10승 3패로 11월을 마감한 클리블랜드는 동부 컨퍼런스 선두 경쟁에 본격적으로 뛰어들었다. 평균 30.5득점을 올린 르브론은 동부 컨퍼런스 이달의 선수로 선정되었다.

12월_ 14승 3패를 올리며 창단 이후 12월 최다승 기록을 세웠다. 브라운 감독은 12월 반격의 한 달로 선언했고, 클리블랜드는 새로 들어온 선수들이 서서히 자리를 잡으며 경기력을 회복해갔다. 22경기 연속으로 상대 야투율을 50% 미만으로 묶으며 수비팀의 면모를 되찾았고 오닐을 이용한 작전수행능력도 크게 향상됐다. 조울증으로 고생하던 웨스트가 제 자리를 찾으면서 벤치 경기력도 크게 나아졌다. 크리스마스에 레이커스를 상대로 거둔 대승은 이러한 자신감을 잘 보여주는 경기였다.

2010년 르브론이 FA로 나올 것으로 점쳐지는 가운데, 클리블랜드는 창단 이후 첫 우승을 향해 전력질주하고 있다. 창단 40주년을 맞는 2010년 클리블랜드의 발걸음을 주시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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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일(한국시간) LA 레이커스와 클리블랜드 캐벌리어스의 경기가 개운치 않은 여운을 남겨 이목을 집중시키고 있다. 경기 종료시간이 채 반나절도 되지 않았지만, 현지 미디어 커뮤니티를 비롯하여 국내외 포럼에서는 금일 경기의 심판판정을 두고 열띤 논쟁이 펼쳐지고 있다.

오늘 경기는 이견의 여지도 없이 클리블랜드가 월등한 경기력을 과시하며 손쉽게 승리를 가져갔다. 때문에 아쉬움과 분노를 토로하는 것은 레이커스 측이다. 물론 심판판정이 100% 패배의 원인은 아니지만 어느 정도 비중 있게 작용을 했다는 목소리가 적지 않다.

스테이플센터에 운집한 2만여 관중들은 급기야 4쿼터 중반, 레이커스 전용 응원도구를 코트에 집어 던지는 극단적인 항의를 하기에 이르렀다. 바쁜 추격전을 펼치던 레이커스의 코비 브라이언트가 수차례 슈팅파울이 불리지 않자, 마지못해 관중들이 분노를 표출시킨 것이다.

코비는 경기 후 가진 인터뷰에서 “파울을 범하더라도 최소한 상대선수가 다치지는 않아야 할 것 아닌가. 파울콜이 불리려면 거품이라도 물어야 할 것 같다”며 강한 유감을 표했다.

레이커스의 수장 필 잭슨 감독은 “오늘 같은 홈팬들의 반응은 본적이 없다”며 운을 뗀 뒤 “오닐이 코비를 4번이나 넘어뜨렸지만 휘슬은 불리지 않았다”고 거들었다.

하지만 그 누구도 식스맨 라마 오돔만큼 최악의 크리스마스 저녁을 보내지는 않았을 것이다. 후반전에 테크니컬 파울 누적으로 코트를 떠나야했기 때문이다.

오돔은 “심판들의 열정은 존중하지만 편파판정은 유쾌하지 않다. 판정이나 경기나 최악이었다”며 불편한 심기를 감추지 않았다.



그렇다면 승리를 거머쥔 클리블랜드의 입장은 어떠할까?

간판스타 르브론 제임스는 신중한 입장을 밝혔다. 금일 경기는 크리스마스 매치를 떠나서 미리 보는 파이널이라 해도 부족함이 없는 최고의 시험무대였다. 때문에 르브론은 “레이커스나 우리에게 중요한 경기였다. 그래서 오늘의 원정 1승은 팀에 좋은 동기부여가 됐다. 레이커스는 리그 최고의 팀이기 때문이다”며 승리에 대한 기쁨을 표하는 한편 “가득 찬 물병을 집어던지는 행동은 옳지 못하다. 선수든 심판이든 누구나 다칠 수 있지 않은가. 그런 상황은 누구도 원치 않을 것”이라며 몰지각한 일부 관중의 행동을 꼬집었다.

‘패자는 말이 없다‘고 하지만 냉철함과 프로의식이 결여된 판정은 반드시 지양 돼야 한다. 그래야만이 팬과 선수들, 나아가 리그가 보기 좋게 공존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상호간의 불신은 자칫 집단의 퇴보로 이어질 위험도 크다는 사실을 결코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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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리블랜드 캐벌리어스가 크리스마스 메인무대의 주연으로 우뚝 섰다. 클리블랜드는 26일(한국시간) 스테이플센터에서 열린 크리스마스 매치에서 LA 레이커스를 102-87로 제압하고 짜릿한 크리스마스 선물을 챙겼다.

이로서 레이커스는 역대 NBA 크리스마스 최다 승리(現 20승) 기록경신을 내년으로 미루게 됐고, 코비 브라이언트는 샤킬 오닐과의 12월 맞대결을 4연패로 늘리며 유쾌하지 못한 크리스마스 밤을 보내게 됐다.

초반 분위기를 제압한 것은 클리블랜드였다. 클리블랜드는 레이커스의 잇따른 실책을 착실히 골로 연결시키며 일찌감치 앞서 나갔다. 간판스타 르브론 제임스는 1쿼터에만 9점을 집중시켰고, 오닐은 덩크슛만 3개를 터트리며 분위기를 이끌었다.

한 번 넘어간 기세는 쉽게 꺾이지 않았다. 오른손 검지 손가락 부상을 안고 있는 코비가 야투 난조에 빠진데다가, 앤드류 바이넘과 파우 가솔간의 2대2 플레이는 사전봉쇄 되며 공격의 활로가 막혔기 때문이다. 하지만 한 때 20점 이상 벌어졌던 격차는 전반 종료와 함께 크게 좁혀져 있었다.

반전의 기틀을 마련한 것은 다름 아닌 론 아테스트. 르브론의 전담마크를 담당한 아테스트는 호수비와 함께 2쿼터에만 8점을 몰아넣으며 존재감을 발휘했다. 여기에 코비의 적극적인 골밑공략까지 뒤따르며 레이커스는 희망의 불씨를 지폈다. 한편 휴식을 마친 르브론은 전반 종료 부저소리와 함께 하프라인 3점 슛을 성공시켰지만, 비디오 판독 끝에 무효처리 되어 아쉬움을 자아냈다.

후반전은 더욱 치열한 분위기속에 전개됐다. 스포트라이트를 독점한 코비와 르브론 역시 코트바닥에 몸을 던지는 등 승리에 대한 의지를 감추지 않았다. 리그에서 가장 많은 화제를 쏟아내는 인기팀간의 대결이기 때문에 플레이오프를 방불케 했다. 때문에 휘슬 소리 하나에도 민감한 반응이 뒤따르며 선수들과 주심들의 움직임도 분주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팽팽한 긴장 속에서도 클리블랜드는 리드를 놓치지 않았다. 윌리엄스가 후반전을 알리는 신호탄을 연거푸 쏘아 올린데 이어, 오닐의 파워 넘치는 덩크슛과 르브론의 득점포가 계속됐다.

클리블랜드는 리그 최고의 높이를 자랑하는 바이넘과 가솔 트윈타워에 맞서 오닐과 일가우스카스로 높이 경쟁에 나선 것이 주효했다. 레이커스의 골밑 공격력이 무력화되자 자연스레 코비에게 공격부담이 가중된 것이다. 여기에 최근 레이커스의 아킬레스건으로 거론되는 벤치 지원사격이 오늘도 전혀 이루어지지 않아, 주전 선수들의 체력안배도 패인으로 작용하였다.

승부의 분수령인 4쿼터에서도 결국 활기 넘치는 움직임을 보여준 클리블랜드 벤치가 승부를 마무리 지었다. 벤치에너자이저이지만 사실상 잉여전력에 속하는 자마리오 문은 호쾌한 슬램덩크와 3점슛을 터트리며 레이커스의 추격의지를 꺾는데 일조했다.

한편 경기종료를 4분여 앞두고 심판판정에 불만을 품은 일부 관중들이 응원도구를 코트에 투척하며 기분 좋은 크리스마스 저녁에 눈살을 찌뿌리게 만들었다.

이밖에 전통의 라이벌전으로 관심을 모았던 마이애미 히트와 뉴욕 닉스의 경기는, 30점 9리바운드로 활약한 드웨인 웨이드의 마이애미가 성탄 자축포를 올렸다. 뉴욕은 무려 7년 만에 크리스마스 무대에 모습을 드러냈지만 홈팬들에게 실망만을 안겼다.

동부컨퍼런스의 강력한 우승후보로 꼽히는 보스턴 셀틱스는 숙적 올랜도 매직과 접전 끝에 86-77으로 승리했다. 양 팀은 강력한 수비를 앞세우며 많은 득점을 바랐던 팬들의 기대를 충족시켜주진 못했다.

보스턴은 식스맨으로 출장한 라쉬드 월라스를 포함하여 5명이 두 자리 득점을 올리는 등 고른 공격분배가 이루어졌지만, 올랜도는 3할에 그친 팀 필드골 성공률로 악몽의 크리스마스를 보냈다. 특히 간판스타 드와이트 하워드의 부진이 뼈아팠다.

하워드는 리바운드를 20개나 걷어내며 골밑을 장악했지만, 7개의 야투만을 시도하며 이 중 6개를 허공에 날리는 등 적극적인 공격참여에서 아쉬움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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